실패 <퀴어가이드 12호 발췌>

커밍아웃 스토리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 커밍아웃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사람이야 있을리가 없을테지요. 그간의 일상과는 다른, 장막을 치고 그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무개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테니 말이죠. 이런식으로 사는게 거짓된 삶을 사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고,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숨기는 삶이 있다는 지독한 현실이 싫어서 이 장막을 걷고 세상에 드러나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자면, 정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이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기 아니라 할지라도, 예를 들면 누군가 장막을 걷으려 한다면 그 장막을 걷게 놔둘지 아니면 장막을 붙잡고 그 뒤에 숨어 때를 기다릴지 이런 상황에서도 명확한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그게 벌써 작년 봄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죠. 작년 봄 학기에는 나름 재미있게 지냈었지요. 연애도 하고, 기타 등등. 그런데 방학쯤 되어서 문제가 터져 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용한 일이죠. 우리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추리를 하셨길래 제가 연애한 사실을 누나한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단 사실을 가지고 제가 남자를 만난다는 결론을 내리신걸까요? 만약 제가 게이가 아니었어도 연애 사실을 누나한테 숨겼을거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그날 전 그런줄도 모르고 즐거움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지요. 오랜만에 엄마집에 내려가서 맛난 밥도 먹고 여차저차 하다가 엄마아빠가 좀 진지한 얘기를 할 분위기를 잡으시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걱정 은 안했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 짐작이나 할 수 있었나. 그냥 그때 좀 씀씀이가 크다고 지적을 하시곤 했으니 그 얘기일줄 알고 앉았는데, 뭔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자니 쎄~한 느낌이 들더군요. 연애했던거 얘기를 좀 하시더니 누가 소개를 시켜서 어떻게 만났느냐 소개시켜 준 사람은 남자냐 여자냐… 사실 그때 어느정도 감이 오긴 했었는데… 만약 계속 오리발 내밀면 무슨 물증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 아실 제주가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또 거짓말하긴 좀 싫고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장막을 걷어버리고 싶단 생각도 들어서 복잡하게 머리회전 팍팍 시키면서 궁리하고 있는데 제일 친한 친구한테 커밍아웃 했을때가 생각나더군요. 걔가 동성애를 잘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제법 있는 멘탈의 소유자라고 생각되어서 걱정을 많이 했었으니 말이죠. 그래도 제일 친한놈이니 눈 딱 감고 얘기를 했더니 “나는 네놈을 잘 이해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너와 함께한 시간들을 버릴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그때 진짜 감동받았었는데 … 그런데 그때 감동을 선사한 친구의 한마디가 내 크나큰 실책을 불렀단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지… 무슨말인가 하니 ‘그래, 십수년을 만나온 친구도 저리 말하니 이십사년 인생을 지켜보며 함께 해주신 저 분들도 나를 존중해 주시겠지?’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에 장막을 걷어버린다는 선택을 해 버린거죠.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짓이었지요. 부모님이랑 친구놈이랑은 여건이 다른건데 그걸 생각 못했으니. 그래서 그때 진짜 난리가 났지요. 아빠가 애땐 파리채 몇 개 분지르셨고 난 여행가방에 짐싸고 당시 내 재주만 가지고 혼자 살 방법 모색해 봤으니까요. 그래도 결국 차마 집 나오진 못하겠더라고요. 붙잡으시는데, 힘이 아니라 슬퍼하시면서 붙잡으시는데 그걸 외면하고 집 나가는건 차마 못하겠어서… 그래서 그렇게 임시로 상처 봉합처리만 했죠. 그래서 지금은 매우 불안불안한 휴전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가족들은 내가 게이란 사실이랑 연관될만한 어떤 얘기나 기미도 보이지를 않고, 나도 집에서는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가족들은 내가 일단 지금 이쪽 생활을 접었다고 생각하시려나 어쩌려나 감도 잡히지 않네요. 일단 그러기를 바라고는 계실테지만 진짜 내가 이쪽생활을 접었다고 생각 하시려나… 일단 학교는 보내야 하니 서울로는 내보내고서도 안심이 안되시는지 이런저런 감시를 좀 하고 계시긴 한데 영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집에 커밍아웃을 하고 행복하게 사는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꿈은 정말 물거품이 되어버렸죠. 차라리 그냥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어야하나 후회하는게 하루이틀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중에 ‘마음가는 길은 죽 곧은길’이라는 게 있는데, 이날 선택은 ‘마음가는 길은 곧 죽은길’ 이라고 설명할만한 선택이 되어 버렸으니까 말이죠. 지금의 이 거짓된 평화가 얼마나 더 유지될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더 슬픔을 겪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어찌될지는… 나로서도 감을 잡을 수 없지만 한가지 만큼은 분명하죠. 사람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는거.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답변했더라면 이런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는 것,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에서 이런 글을 남기게 되네요. 나는 조금 실패한 것 같지만, 부디 모든 사람들이 신중하기를.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가는 길은 죽 곧은 길이고 필요한 때에 작은 행운이 깃들기를 .

퀴어가이드 12호 pp.71-72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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