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퀴어가이드 13호 발췌>

“그래서 언제 나왔어요?”

이쪽 사람들에겐 그냥 흔한 질문이겠지만 이 질문은 상당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25살이 되던 해 나의 정체성을 깨달았다. 사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깨달았다기 보다는 거부하고 있던 것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과 달라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보수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초등학생 때 염색을 심지어 부모님이 권유했음에도 보기 좋지 않다며 거절했던 나였고, 다른 친구들 모두 페스트푸드를 먹기 시작할 때 몸에 안 좋다며 먹지 않다가 햄버거를 초등학교 6학년때 처음 먹었던 나였다. 항상 무언가를 받아들임에 느렸다. 때문에 나는 어릴 적 잘 생긴 먼 친척 형들을 보고 좋아했던 걸 ‘무시했다’. 고등학교를 나와서 처음으로 두근거리는 친구를 만났을 때도 그저 좋은 친구라며 ‘무시했다’. 대학 생활 중에, 군대에 있을 때 만났던 멋있는 친구들을 보며 그저 닮고 싶은 것뿐이라며 ‘무시했다’. 그리고 내가 택한 길은 사회적으로 획일화된 하나의 표본이었다. 남자는 무조건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회적인 통념에 발맞추고자 여자를 사귈 수 있으면 사귀려고 노력했다.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노력했다’. 그래, 솔직히 인정 받고 싶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지만 나는 내 진심에는 항상 등 돌리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했고 항상 나를 숨겼다. 나는 동성애자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호모포비아였고 그런 동성애를 비난하고 부정하는 행동들이 유일하게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것은 동성애자인 나를 이성애자로 포장해주는 마지막 하나뿐인 방어막이었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나는 다른 또래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믿었고 남들과 같이 행동하면 그토록 원하는 사회의 일반적인 표본에 이를 수 있다 생각했다. 이런 비인간적인 생각들로 인해 나는 사회적으로는 같은 또래에 비해서 어느 정도 성공했고 활발히 사는 인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는 공허하고 피폐해져 있었다.

25살이 되기까지 나는 나좋다고 하던 여자들 중에 ‘이 여자랑 사귄다고 하면 내가 좀 인정 받을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한 여자들에게 고백해서 사귀곤 했다. 그렇게 사귄 여자가 넷이지만 그들에게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도 없고 공유해 본 적도 없다. 20대 초반에는 난 인연을 못 만난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공허함이 찾아올 때마다 친구들에겐 공감을 구하기 싫어 인터넷에 공감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 때마다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모태솔로’ 나 ‘안 생겨요’ 라는 단어들이 나를 위한 단어구나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았다. 이런 이유로 그 당시 인터넷은 나의 행동과 삶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25살이 되었을 때, 이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못해봤다는 것은 나 역시도 큰 짐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마지막이 된 여자친구와 마침내 육체적인 관계를 갖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직접 해준 요리와 술 한잔, 그것들은 그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고 나와 그녀는 서로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의 기분은 사랑하는 여자를 만지는 기분이 아니라 목석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충분히 사랑 받기 마땅한 여자였지만 내 맘 속에서 도무지 사랑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았고 그녀를 만지는 내 손은 그저 부자연스러울 뿐 어디를 만져야 할지 몰랐고 결국 두려움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 당황스럽고 어색한 순간은 더 이어지지 않았고 그녀가 집에 간후 나는 허탈함에 빠져 버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를 잘 알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녀가 나에게 얼마만큼의 감정을 소모했는지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나서도 나는 이 허탈함의 이유를 쉽사리 찾지는 못했다.

그러다 군대 시절 축구하고 나면 같이 샤워하고 야근을 같이 하면 라면도 함께 끓여먹으며 함께 무언가를 많이 하며 따랐던 선임을 밖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선임을 만나고 난 그 이유에 조금은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나는 그 선임을 그저 좋은 사람 정도로 여겼다 생각했는데 내 머리와는 다르게 내 마음은 그 선임과 함께 있을 때 정말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을 쉽사리 쳐다보기 힘들었고 같이 있는 그 순간순간이 가시밭길 같았다. 그 선임이 눈치 채면 어쩌나 싶어 나는 그 자리를 황급히 떴고 결국 내가 교환학생을 간다고 잘 갔다 오라며 밥을 사주던 선임과는 고작 한 시간 남짓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와서 지난 일들까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모든 퍼즐은 정말 신기하게도 딱딱 맞았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인정한다면 돌이켜 보면 친구들이 여자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겉도는 느낌이었고 친구들이 예쁜 여자, 섹시한 여자들을 찾을 때 나도 친구와 맞춰주기 위해 여자를 쳐다보면서도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옆에 남자였다. 이렇게 퍼즐을 맞춘 시기는 내가 25살이 되던 해 8월, 하지만 난 9월이 되면 정해진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해야 했다. 8월 한 달 간 난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혼자 너무 깊숙히 파고 들어가 어떻게 해어나올지를 몰랐다. 그 당시 나는 그저 나에 대한 저주를 하며 이를 타계해 나갈 방법만을 찾았었다. 어리석지만 당시 내 의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기대감보다는 절망감을 안고 교환학생 생활을 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외국은 성적으로 조금 더 개방됐다 생각했기 때문에 ‘노력하면’ 이성애자처럼 살 수 있다는 아주 작은 기대감은 가지고 떠났다. 아니면 아예 게이 친구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이 쪽 세계에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찌됐든 나를 규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살게 된 플랫폼에는 내가 기대하는 게이 친구는 없었고 시간이 지나고 외국 여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이성애자처럼 될 수 없다는 낙담만 들게 되었다. 내가 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외국 친구들에게 이런 사실을 토로할 수도 없었고 결국 나는 나를 닫아두고 자꾸 깊숙히 빠져들었다. 하루하루는 절망이었고 나 같은 존재는 세상에 필요 없다는 생각도 했었다. 너무 오랜 시간 나 자신을 부정하며 살았고 동성애가 옳지 않다는 생각도 해왔기 때문에 이 시간은 나로써는 너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삶을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죽은 것이 무섭기도 했고 죽어도 한국에서 죽자는 생각에 그저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해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저녁에 근처 도시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동안 나 자신을 잠식시키고 참아왔던 것이 지극해서 잠깐이라도 모든 걸 잊고 싶어서 그 축제에 참가하기로 했다. 축제에 참여하기 전에 우연히 연락된 외국의 게이와 축제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게이였고 그와 대화하면서 그간 잠식시켰던 나를 잠시나마 풀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식이 아니었고 아직도 사랑을 나누는 것은 부담스러웠기에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런 것은 없다.

축제는 생각보다 성대했다. 변화가를 다 봉쇄하고 유명 DJ와 밴드를 초청해서 도시 전체를 마치 하나의 클럽처럼 만들어 놓았다. 평소에 클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는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침내 1월 1일이 되는 자정에 새해를 기념하는 대형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폭죽과 함께 그 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연인과 포옹하거나 키스했다. 비록 나에게는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나의 끝과 하나의 시작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다는 그 사실은 나에게 ‘나도 사랑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주었고 나도 그 폭죽과 함께 나를 짓누르던 감정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후 나는 게이로서의 삶을 살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만큼 공개적으로 생활할 수는 없었다. 외국의 LGBT 동아리는 생각보다 크고 공개되어 있어서 내가 참여하기에는 여전히 부담이 있엇다. 마음은 많이 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공개적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감추고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나는 나같이 사회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쪽에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일찍 깨닫지만 나는 분면 나 같은 사람도 있다 확신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너무 힘들 때 자신이 게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던 사람들에게 힘을 얻었던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표가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성소수자 동아리에 가입한 것도,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다 그 사람들 어쩌면 글을 일고 있는 당신을 위해서 쓰는 걸지도 모른다. 당신이 누구든 누구를 사랑하든 그것은 자연스럽고 존중 받아야 하는 일이다.

퀴어가이드 13호 pp.14-15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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